1970 | 잘 살아보세

1970년대, 대한민국은 폐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겨우 일어선 1960년대를 지나, 이제 대한민국에 성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연평균 GNP 성장률 10% 이상. 1인당 국민소득은 1970년 253달러에서 1977년 1,000달러를 돌파했습니다. 한국 밖에선 이를 두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대의 광고에는 그 성장의 속도와 기적의 열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국가가 만든 최초의 대중 캠페인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창했습니다. 정부는 전국 3만 3천여 개 마을에 시멘트를 똑같이 335포대씩 무상으로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잘한 마을에는 더 주고, 못한 마을에는 주지 않는 경쟁을 설계했습니다.

광고인의 눈으로 보면 새마을운동은 놀랍도록 완성도 높은 통합 캠페인입니다. 캠페인 슬로건(“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이 있고, 심벌(초록 바탕의 새마을기)이 있고, 징글이 있었습니다. 1972년 보급된 새마을 노래는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해 전국의 확성기에서 매일 아침 재생됐습니다. 모자와 작업복이라는 유니폼, 반상회와 마을회관이라는 오프라인 접점, 라디오와 대한뉴스라는 매스 미디어까지—오늘날의 용어로 옮기면 브랜드 아이덴티티, 오디오 브랜딩, 채널 전략이 모두 갖춰져 있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캠페인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캠페인
스크린샷 2026-09-18 오후 1.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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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구조도 명확했습니다. 가난은 숙명이 아니라 게으름의 결과이고, 부지런하면 잘 살 수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세 단어는 전 국민이 외울 수 있는 카피였습니다. 이 시기 한국인이 배운 설득의 문법—목표를 제시하고, 정신력을 요구하고, 집단으로 돌파한다—은 이후의 한국 사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됐을 때, 농촌 사람들은 포스터의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구호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다 해줄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국가에도 돈이 없고, 삼천리 방방곡곡 작은 마을에 그 힘이 닿을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을 회의를 열고, 어디에 도로를 낼지 논의하고, 초가지붕을 함께 걷어냈습니다. 나 혼자는 못하지만 우리가 하면 된다는 가능성이 새로웠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5
1970년대 새마을 운동 5

중화학공업 시대의 개막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그리고 1973년 6월, 포항종합제철 1고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경공업 국가에서 중화학공업 국가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을 기반으로 착공에 들어가, 대한민국 최초의 일관제철소로서 첫 쇳물을 토해내며 국가 산업화의 굳건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습니다. 철강·비철금속·조선·기계·전자·화학의 6대 전략업종을 지정하고, 포항에 철강, 울산과 여천에 석유화학, 거제에 조선, 창원에 기계, 구미에 전자를 배치했습니다. 지도 위에 산업을 배치하는 방식의 국가 운영이자 정부가 주도한 경제 개발의 밑그림이었습니다.

포항제철 (1973)
포항제철 (1973)

1976년에는 현대자동차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를 생산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 (Giorzetto Giugiaro)가 이끄는 ‘이탈디자인’에 차량 설계를 의뢰해, 시대를 앞서간 세련되고 날렵한 4도어 패스트백(해치백 스타일) 차량을 출시하고, 차명을 공모해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포니’를 출시했습니다. ‘포니’는 출시 첫 해 10,726대가 판매되었는데 당 해 승용차 판매량의 44%에 달하는 수치였습니다. 포항제철, 현대자동차, 금성사, 제일제당, 대우, 태평양화학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고, 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의 자존심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현대 자동차 포니 (1976)
현대 자동차 포니 (1976)

마을을 떠나 도시로

서울 인구는 1970년 약 543만 명에서 1980년 836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인구 500만의 도시에 10년 만에 300만 명이 더 밀려들었고,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월급을 받는 세대가 처음으로 대규모로 등장했습니다.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시작으로 반포와 잠실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3대가 같이 살던 대가족은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으로 쪼개지기 시작했습니다. TV, 냉장고, 세탁기같은 가전제품이 혼수 목록에 올랐고, 라면과 조미료가 식탁에 올랐고, 월급날과 보너스라는 소비의 리듬이 생겼습니다.

1973년 100만 대를 넘긴 TV는 사치품에서 필수품이 됐습니다. 가구 대비 보급률이 2%에서 80%로 뛰었습니다. TV가 거실에 들어오면서 광고의 무대도 신문에서 브라운관으로 옮겨갔습니다. 수사반장이 안방을 점령했고, 전원일기가 가족들을 TV 앞에 모았습니다. 드라마는 저녁 시간을 채우는 놀이거리가 되었고, 연속극과 광고는 한 묶음이 되어 시청자의 생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수사반장 (1971)
수사반장 (1971)

수사반장 (1971)

중동에 친척이 없으면 간첩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막대한 오일 달러를 쥔 중동 산유국들이 도로, 항만, 플랜트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나섰는데,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164km 건설공사를 시작으로, 현대 건설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 프로젝트 등 중동 국가들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들을 수주해 한국 건설업체와 근로자들이 중동으로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1975년 7억 5000만 달러였던 해외 건설 수주액이 1980년 82억 달러로 급증하며 대한민국 경제의 주요 외화 수입원이자 경제 성장의 발판이 되었고, 1975년 6000명이던 해외 근로자가 1978년 10만 명, 한때 20만 명에 달하며 ‘중동에 친척이 없으면 간첩’이라는 말이 돌 정도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유신, 백지 광고와 격려 광고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었습니다. 12월 27일 공포된 유신헌법은 대통령 간선제와 무제한 연임, 국회의원 3분의 1 지명권을 담았고,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유신 비판 자체가 범죄가 되었습니다.

암울한 정치 상황이 광고사에 남긴 결정적 장면은 1974년 겨울이었습니다. 그해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자, 정부가 기업을 압박해 광고주들이 차례로 광고를 철회한 것입니다. 197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광고면은 백지로 나갔습니다.

1974 동아일보 백지 광고
1974 동아일보 백지 광고

동아일보가 재정적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이 빈자리를 시민들이 메웠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 이름 없는 학생, 월급을 쪼갠 직장인들의 몇 줄짜리 문장이 신문 지면을 채워나갔고, 1975년 5월까지 1만여 건의 개인 광고가 실렸습니다. 공정한 사실을 전함으로써 국민들을 지켜낼 언론의 자유를, 국민들이 직접 지킨 순간이자, 미디어와 광고의 관계가 도드라진 사건이었습니다.

1974 동아일보 응원 광고
1974 동아일보 응원 광고

체제는 1979년에 끝났습니다. YH무역 농성, 김영삼 총재 제명, 10월 부마항쟁, 그리고 10월 26일. “잘 살아보세”로 시작한 10년은 총성으로 닫혔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의 광고는

1960년대의 광고가 “알림”이었다면, 1970년대의 광고는 비로소 “광고”가 됐습니다. 1967년 합동통신 광고기획실, 1969년 만보사를 거쳐, 1973년 제일기획이 설립되면서 광고대행업이 본격적인 산업이 되었고, 1970년대 후반은 제일기획·오리콤·연합광고 3사가 시장을 나눠 가졌습니다. 광고주도 제약회사에서 식품·가전·자동차·화장품으로 넓어졌습니다.

미디어는 텔레비전으로 이동했습니다. 1970년대는 흑백 텔레비전의 시대였고, 컬러 방송은 1980년 말에야 시작되었습니다. 안방에 놓인 흑백 수상기 한 대는 전국민을 동시에 같은 메시지 앞에 앉히는 장치였습니다.

코카콜라의 “오직 그것뿐”, 농심라면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써니텐의 “흔들어주세요”. 계몽이 아니라 기분을, 의무가 아니라 재미를 파는 문장들이 소비자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잘 살아보세”라고 말하는 동안, 광고는 조금씩 “그래서 이걸 사보세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1970년대 한국 광고는 이 두 목소리가 겹쳐 울리는 자리에 있습니다. 근대화의 언어와 욕망의 언어. 다음 편부터는 그 겹침을 구체적인 광고 하나하나로 들여다 보겠습니다.

다음 편: 1970 | 별들의 전쟁의 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