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는 해방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부대에서 흘러나온 병들이 양키시장에 돌았습니다. 비쌌고, 구하기 어려웠고, 마셔본 사람보다 이야기로 들은 사람이 훨씬 많은 음료였습니다. 미제라는 말 자체가 품질 보증이던 시절, 콜라는 그 말이 병에 담긴 물건이었습니다.
코카콜라가 한국에 진출을 결정한건 1968년입니다. 콜라는 부피가 크고 무거워 멀리 실어 나를수록 손해인 물건이라, 코카콜라 본사는 현지 파트너에 농축된 콜라 원액만을 판매하고, 여기에 물을 섞어 병에 담는 보틀링 과정은 현지에서 이루어집니다. 한국에선 한양식품이 첫 보틀링 파트너가 되어 국내 생산을 시작했고, 이듬해 펩시도 들어왔습니다. 미군 부대 담장 너머에서만 구경하던 음료가 한국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한 음료 한 병이 들어온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으로 정의한 사건이었습니다.
물건을 팔 수 있겠다고 판단한 순간
불과 15년 전까지 전쟁의 폐허였고, 원조로 버티던 나라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남짓이던 그 나라를 두고, 코카콜라의 누군가가 ‘이제 여기도 시장이 된다’는 계산서를 썼던 것입니다. 계산은 맞았습니다. 한국 진출 2년차인 1969년 탄산음료 점유율에서 칠성사이다 35%, 코카콜라 25.5%, 펩시 24.3%로 외국 브랜드 둘이 시장의 절반을 가져갔습니다.
1968년, 환타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눈에 띄는 오렌지색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제품이었습니다. 콜라가 어른의 음료라면 환타는 그 집 아이의 음료. 한 가정의 냉장고를 두 칸으로 나눠 갖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1971년 동아제약이 오란씨를, 1976년 해태가 써니텐을 내놓으며 카테고리가 커졌습니다.
비슷한 신호가 이어졌습니다. 1970년 동서식품이 미국 제너럴푸즈와 손잡고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국내에서 만들기 시작합니다. 커피 역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던 물건이었습니다. PX 담장을 넘어오던 것들이 하나씩 한국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1977년, 글로벌 광고의 시작
코카콜라는 음료만 팔지 않았습니다. 드라이브 데이트, 스키, 뱃놀이, 줄다리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여가를 즐기며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미지를 같이 팔았습니다. 스키를 소재로 한 광고는 국내 최초의 스키장이 개장도 하기 전의 광고였습니다.
로고 옆의 ‘산뜻한 그맛’ 정도를 제외하면 제품에 대한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광고인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꽤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동안은 무엇이 좋은지, 왜 다른 제품보다 나은지를 말하는 것이 광고의 일이었습니다. 코카-콜라 광고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맛도, 성분도, 가격도 말하지 않고 분위기와 라이프스타일만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팔렸습니다.




1977년 코카콜라의 글로벌 광고가 1977년 한국판으로 만들어집니다. 외국에서 사용되었던 멜로디에 한국어 가사를 붙이고 한국 사람들이 부르는 형식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같은 멜로디를 깔고 나라마다 언어만 바꾸는 방식도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글로벌 캠페인의 현지화라고 부르는 일이, 이때 한국 광고 시장에 실물로 도착했습니다.
정보가 아닌 분위기와 스타일로 광고하는 것을 배우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1977년, 오란씨는 작곡가 윤형주가 만든 CM송과 ‘오란씨 걸’로 한국인의 귀를 사로잡습니다. 외국 브랜드가 가져온 어법을 국산 브랜드가 그해 안에 자기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설명 대신 노래로, 이유 대신 기분으로 말하는 광고. 1970년대 후반 한국의 브라운관이 CM송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그 학습의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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