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와 꼭 같은 럭키치약
1954년, 락희화학공업사(지금의 LG화학, LG생활건강)가 국내 최초의 치약인 럭키치약을 내놓고 신문 광고를 시작합니다.

“미제와 꼭 같은 럭키치약.”
“미제와 꼭 같은” 이 여섯 글자 안에 전후 대한민국 소비자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미제(美製), 미국산. 그것이 기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치약이 대중화된 것은 해방 이후입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소금이나 숯으로 이를 닦았습니다. 치약이라는 물건을 처음 본 것도 미군 덕분이었습니다.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콜게이트는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한 냄새를 풍겼고, 미제가 좋다는 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상식이었습니다. 다만 콜게이트가 좋다고 해서 이 제품을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럭키치약은 “미제와 꼭 같은”이라는 헤드라인에 “미국 원료와 처방으로 제조된”이라는 부연 설명까지 보태가며, 미제 치약과 똑같은 품질이니 믿고 사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제를 원하지만 구하기도 힘들고 달러로 살 형편도 안 되는 소비자들, 그 욕구와 현실 사이의 간격에 럭키치약이 정확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출시 3년 만에 콜게이트를 제쳤습니다. 품질 좋은 국산 제품이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콜게이트가 의미 있는 시장 점유율을 갖지 못하는 몇 안 되는 시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ABC포마드 — 신사의 필수품, 미군 문화의 수입
지금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1950년대 초에는 남성용 화장품이 여성용 화장품보다 더 많이 소비되었습니다. 전쟁 중이라 여성들의 소비가 줄어든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성용 정발료인 포마드 때문이었습니다. 미군이 들어오면서 긴 윗머리에 윤기 나는 반고체 머릿기름, 포마드를 발라 가르마를 타고 좌우로 갈라 붙이는 헤어스타일이 크게 유행했고, 양복 입고 포마드 바르는 것이 도시 남성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광고 속 남성은 언제나 단정하고 서양식이었습니다. 한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미국을 향한 시선이 광고가 그려내는 이상적 인간상까지 바꿔놓은 것입니다. 태평양화학(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은 식물성 원료와 현대적인 향까지 갖춘 ABC포마드로 시장을 석권하며 종합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할 기틀을 다져나갔습니다. 상표명까지 미군들이 쓰는 영어의 기본, ABC였으니 당시 미국 문화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짐작이 가지 않으신가요?
최고 이미지엔 “나이롱”
지금은 아프지도 않은데 병실을 차지하고 누워 아픈 척하는 환자를 일컫는 ‘나이롱 환자’ 정도로만 쓰이지만, 한때 나일론(nylon)은 고급 사치품의 상징이었습니다. 나일론은 미국 듀폰(Dupont)사가 개발한 최초의 합성 섬유로, 내구성은 좋지만 땀을 흡수하지 못하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1950년대 중반에는 치마, 적삼은 물론 양말, 장갑, 와이셔츠, 러닝셔츠와 속옷까지 ‘나이롱 아니면 못 입겠다는 게 문화인들의 자랑’이 될 만큼 크게 유행했습니다. 나일론이 한 올도 들어가지 않은 상품에도 ‘최고’ 이미지를 빌리려고 ‘나이론’을 갖다 붙였습니다. 나이론 포마드, 나이론 후랙클 크림, 나이론 바니싱 크림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태어난 브랜드들이고, 화장품뿐 아니라 고급 오이, 커피, 두부, 개량 참외 이름에까지 ‘나이롱’을 접두어처럼 붙였습니다. 최고와 고급을 상징했던 ‘나이론’이 겉만 그럴싸한 가짜를 뜻하는 ‘나이롱’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미제라면 양잿물이라도 마신다는 시절의 ‘나이롱’은 정말 핫한 키워드였습니다.

“미제”라는 이름의 동경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구원자였습니다. 원조 물자, 기술, 자본.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이 미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 경험이 “미국 = 좋은 것”이라는 등식을 만들었고, 그 등식은 소비 문화에도 그대로 이식되었습니다.
미제를 원했고, 미국인들을 따라 했고, 미제라면 무작정 동경했지만, 그 와중에 누군가는 치약을, 누군가는 화장품을, 누군가는 라디오를 우리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성장을 위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음 편: 1950-60 |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문제였던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