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 | 정부 주도의 경제 재건

가진 건 사람밖에 없는 나라

1963년 12월, 서독 함보른 탄광. 지하 1,000미터 막장 속으로 한국 청년들이 걸어 들어갔다.

가방 하나 들고 비행기를 탄 사람들이었다. 독일어도 몰랐다. 광부 경험도 없었다. 대학을 나온 사람도 있었고, 교사였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건 몸뿐이었고, 나라가 가진 것도 그것뿐이었다.

대한민국은 1961년 쿠데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지만, 자금이 없었다. 공장을 세울 돈도, 기계를 살 돈도. 담보로 내놓을 자원도 마땅치 않았다. 그때 박정희 정부가 서독에 제안한 것은 사람이었다. 광부를 보낼 테니 차관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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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 (1963)

독일로 떠난 광부는 3년 계약이었다. 월급의 절반을 고국으로 송금했다. 한 달 수입이 당시 국내 공무원 월급의 열 배가 넘었다. 파독 간호사도 뒤를 이었다. 독일 병원 곳곳에 한국 여성들이 배치됐다. 그들이 보내온 달러가 한국의 경제개발 자금으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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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 (1960년대)

1964년에는 베트남으로 군인들이 떠났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한국군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은 조건을 붙여 수락했다. 군인들이 받은 월급과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 베트남 현지 건설 사업 수주. 그 돈이 경부고속도로를 놓고 포항제철의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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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 (1965)

나라가 가진 건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들을 땅 밑으로, 바다 건너로 보냈다. 1960년대 한국의 외화벌이는 그 몸들로 시작됐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자

1967년, 한국의 수출 1위 품목은 가발이었다.

합성섬유가 아닌 진짜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 미국과 유럽에서 패션 아이템으로 불티나게 팔리던 제품. 공장에 앉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엮던 여성 노동자들의 손에서 달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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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수출 1위, 가발

가발 앞에 오징어가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수출 상위권을 차지하던 품목. 그 전에는 중석(텅스텐)이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값이 치솟았던 광물. 정부가 “수출만이 살 길이다” 를 외치던 시절, 팔 수 있는 건 가리지 않았다.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 달러 달성. 정부는 이날을 수출의 날로 선포했다. 전국에 현수막이 걸렸고, 수출 유공 기업에는 대통령 표창이 내려졌다. 1억 달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1962년 수출 총액이 5천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년 만에 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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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수출의날 (1964)

이 시기 광고에는 “국산”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국산 장려. 국산품 애용. 외국산을 사면 나라 돈이 빠져나간다는 논리. 소비자에게 애국심을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물건을 고를 때 애국을 생각하라는 요청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과 나라를 키우고 싶다는 욕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던 시절이었으니까.

가발보다 더 기묘한 수출품도 있었다. 소변이었다.

전국 공중화장실에 흰색 플라스틱 통이 놓였다. 옆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여러분의 오줌이 귀중한 외화를 벌어들입니다. 한 방울이라도 통속에!” 수거한 소변을 화학처리해 일본에 팔았다. 소변 속 우로키나아제(Urokinase)라는 성분이 뇌졸중 치료제의 원료였고, 당시 시세로 kg당 2,000달러였다. 마땅한 수출품이 없던 나라에게 그것은 진지한 외화 수단이었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았다. 손으로 엮은 가발도, 잡아 말린 오징어도, 땅속 석탄 더미 사이를 걸어다니는 사람의 하루도, 화장실 통 속의 소변도. 그것들이 쌓여 1970년대 산업화의 밑천이 됐다.

*다음 편: 1950-60 | 주인공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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